드디어 모두의 눈엣가시였던 우구이스마루가 혼마루에서 자리를 비웠다. 옆에서 부모의 마음으로 지쳐보던 초기도와 사니와를 조용히 연모하던 남사들의 합작품은 마이페이스로 사니와를 독점하려는 휘파람새를 오랜 시간동안 멀리 날려보냈다.
초기도와 첫 단도가 희생양이 되어 생긴 틈을 놓칠 바보는 없었다. 눈치만 보느라 사니와에게 다가가지 못했던 이들이 순식간에 그녀를 에워싸고 정신없이 재잘거렸다.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과 전하고 싶었던 말이 뒤섞여 휘몰아치길 한나절, 사니와는 웬만한 남사들을 거친 후에야 아와타구치 단도들에게 인도되어 겨우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아니, 이게 다 무슨일이람. 매일 보면서 하고 싶은 말들을 쌓아놓고 있었네."
"글쎄요. 항상 보게 되더라도 함께 즐기고 싶은 일들은 많은 법이니까요."
사니와의 옆에서 양갱을 자르던 마에다가 사니와의 손에 얇은 포크를 쥐어주었다. 사니와가 특별히 좋아하는 맛으로 고른 보람이 있었는지 힘들어 보였던 표정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남사였다면 벚꽃잎을 휘날렸을 드라마틱한 반응에 단도들이 산뜻하게 웃어버렸다.
부담 주지 말고 근시의 빈 자리를 전부 채워버리라는 이치니의 명령을 완벽하게 수행한 덕분인지 사니와를 둘러 싼 분위기는 온화하기 그지없었다. 시나노가 이따금 사니와의 품에 안기고 싶은지 정좌 자세로 몸을 움찔거리다, 야겐의 눈초리와 아츠시의 팔뚝 찍기에 불만을 표시한 것을 제외하면 완벽한 시간들이었다.
이렇게 평화로웠던 적이 얼마만이었던가. 마에다의 반대편에서 사니와의 옆자리를 채우고 있던 히라노는 정성껏 우려낸 차를 주군에게 내밀었다.
"주군, 차도 함께 드세요. 목이 메이진 않으신가요?"
"고마워라. 잘 마실게?"
히라노는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미다레가 휘파람을 불며 사니와를 독점한다며 야유했다. 장난스러운 목소리에는 형제를 향한 애정이 배여있었고 다정다감한 분위기에 다시 한 번 웃음꽃이 소담하게 피었다. 금세 자기들끼리의 이야기를 시작한 단도들에게 귀를 기울인 사니와는 히라노가 언젠가 선명하게 보고 싶었던 모습이었다.
마에다 또한 사니와의 얼굴만 빤히 보고 있다가 히라노와 눈을 마주치고 헛기침을 했다. 사니와가 놀라며 등을 다독여주었지만 오히려 마에다를 부끄럽게 하는 일이었다. 이렇게까지 주군의 옆에서 맘 놓고 웃을 수 있다면. 이렇게 소중한 시간이 계속된다면. 우연히 사니와와 눈이 마주친 히라노는 누구에게라도 간절히 빌고 싶었다.
그런 마음을 먹은 게 죄였을까. 부드럽게 눈웃음을 치던 사니와가 입에서 찻잔을 떼며 방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희미하게 말 투레질 소리가 들렸다. 가볍게 튀어다니던 웃음소리도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어느새 방 안쪽으로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런. 내가 방해한건가? 원정결과를 보고하러 왔는데 말이지."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리자 그들의 주군은 매정하게도 벌떡 일어나 닫혀있던 문을 열었다. 문 바깥에서 한 발짝 떨어져 기다리고 있던 우구이스마루는 사니와를 보자 허리를 끌어 안고 제자리서 한 바퀴를 돌았다. 말로만 듣던 일을 실제로 보게 된 남사들은 입을 벌리며 넋을 놓고, 이미 몇 번 목격했던 이들은 잔뜩 인상을 구겼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는지는 둘째치고서라도, 같이 원정을 나갔던 초기도와 첫 단도는 어째서 부대원일 뿐인 우구이스마루를 말리지 못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일을 꾸민 자끼리의 약속에는 없던 사항이다.
사니와 어깨 넘어로 단도들의 질투섞인 눈빛을 보던 우구이스마루는 여유롭게 웃었다. 단아한 미소 속에 숨겨진 매끈한 검날을 발견한 이들을 하나하나 내려다보며 기선제압으로 찍어누르길 수 차례, 헤이안의 한 태도는 보호자가 없는 단도들 기를 완전히 죽여놓은 후에야 반갑게 맞이하는 사니와를 품에서 내려놓았다.
"어서와, 우구이스마루! 다른 애들은 어디갔어?"
"카센 카네사다와 사요 군은 귀환하다 사이좋게 넘어져서 말이야. 심하게 부어오르기에 내가 먼저 방으로 돌려보냈지. 사소한 건 신경쓰지마."
"아이 참. 무슨 일로 그리 칠칠 맞게 굴었대, 둘 다."
사니와는 잔뜩 걱정하며 한숨을 쉬었지만 방 안에 남아있던 단도들은 더욱 더 긴장했다. 우구이스마루가 말을 끝마치며 비틀었던 입꼬리를 눈에 똑똑히 새겨넣고 말았다. 경험을 최고치로 높였던 이들이 겨우 넘어졌다는 이유로 제 몸보다 사니와를 먼저 생각할 리 없다.
"안되겠네. 경상이라도 수리해야겠으니 보러 가야겠어."
"굳이 번거롭게 갈 필요가 있을까? 아와타구치의 아이들 중 하나를 시키면 되겠지."
혹은 전부. 우구이스마루는 사니와를 잡아 끌며 아와타구치가 방에서 나갈 길을 만들었다. 무언으로 복도를 가리치는 손 끝에서 단호함이 엿보였다. 가장 먼저 일어선 이는 야겐이었다. 환자를 돌보고 오겠다는 핑계는 사니와에게 잘 먹혀들었다. 뒤이어 겨우 숨만 쉬고 있던 단도들이 갖가지 이유로 방을 나갈 구실을 지어냈다.
이런 식으로 물러나고 싶지 않았지만 상대는 사니와에게 가장 아낌받는 남사였다. 사니와에게 귀여움을 받았던 시간이 짧기만 하니 분하고, 또 억울하여 쫒겨나는 이들의 눈 밑이 붉어졌다. 히라노는 가장 마지막으로 빠져나와 방문을 닫아걸었다. 마에다가 저 멀리 모퉁이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눈짓으로 자리를 피하게 만들었다.
"우구이스마루 공."
"뭐지, 히라노 군."
"한때 연이 있던 자로 드리는 말입니다. 주군은, 주군입니다. 그걸 잊으면 피차 곤란합니다."
사니와의 머리카락을 빗어내리며 장난치던 손가락이 멈췄다. 사니와마저 분위기를 읽고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우구이스마루는 한 방 먹은 얼굴로 미소를 지웠다. 재빠르게 사니와의 허리를 낚아채 히라노와 반대편으로 방향을 틀었다.
"설마 그렇게 나올 줄이야. 잊지 않도록 하지."
등을 보인 채 대답한 그는 이대로 가도 괜찮냐는 사니와의 걱정을 자잘한 것이라 일축하며 빠르게 멀어졌다.
저렇듯 무조건 거절하지 못하는 주군도 문제지만, 그런 주군을 자각도 없이 멋대로 휘두르려 하는 괘씸함이 더 큰 골칫거리다. 차라리 서로 연서를 보내며 모두의 인정을 받았다면, 초기도마저 공인한 사이였다면 이렇게까지 속 썩을 일도 없었을 터.
히라노는 육신에서 한껏 우러나오는 한숨을 토해내며 아와타구치 단도들이 사라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쯤 고백도 없이 주군을 한 입에 삼켜넣으려는 어떤 새에 대하여 피를 토할 열정으로 성토하는 대회가 열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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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誉, MVP)
소우자에게 검으로서의 명예, 적 부대를 쓰러트리는데 가장 일조한 자에게 주어지는 호마레란 상당히 중요했다. 사니와를 만나기 전, 가장 아꼈던 주인의 이름을 품은 채 장식용으로 남아버린 탓일까. 근시가 아닌, 단순한 부대원일 때의 소우자는 호마레에 대한 집착이 남달랐다.
"저를 건드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마지막 적이 쓰러지고 콘노스케가 적아의 피해를 계산한다. 한창 자라나고 있는 단검들, 경험을 끝까지 쌓아올린 타도들을 제친 소우자는 산교대교의 마지막 명예를 손에 쥐었다. 이에 아카시 쿠니유키를 함께 찾으러 왔던 호타루마루가 입을 벌렸다. 부대의 앞을 이끌고 있던 사요는 당연하다는 눈으로 먼저 회군했다.
"굉장하네. 소우자씨가 호마레를 몇 번이나 가져갔지?"
"아마... 여덟 번 정도일거에요. 근시가 아닐 때의 소우자씨는 굉장하니까요..."
그나마 남아있던 호마레 기회를 전부 독차지한 고코타이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다들 혼마루에서 보면 약해보이고, 금방이라도 스러질 인상인데 야전에만 나오면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 특히나 소우자 사몬지라는 검은, 같은 도종에 비해 약한 편이라고 들었는데 경험의 차이는 무시 못하는 것인지 초기도마저 맥을 못춘다. 호타루마루는 소우자의 뺨에 묻은 피를 빤히 바라보다 부대의 뒤를 쫒아갔다. 귀환해서 이 사실을 단도 부대에 속한 아이젠에게 말한다면 거짓말하지 말라고 등을 때릴 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1부대가 소득없이 귀환하자 사니와는 한숨을 쉬면서 수리실의 문을 열었다. 이미 전부터 수리 받고 있는 남사들 덕분에 자리가 모자라고 말았다. 가장 빨리 수리되는 단도들부터 밀어넣어도 수리실 앞은 다친 남사들이 서넛은 항상 대기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경상조차 입지 않은 소우자는 근시 자리를 건네받고 사니와를 도와 부대원을 보살폈다.
수리패를 반드시 아껴야 한다는 하카타의 지론에 따라 모든 부상자를 수리실로 밀어넣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초조하게 수리시간을 재느라 출진할 때마큼 진이 빠져버린 사니와는 대기자들이 앉아있던 긴 의자에 널부러졌다.
소우자는 안쓰럽게까지 느껴지는 모습에 한숨을 쉬고 사니와의 곁에 똑바로 앉았다. 당연하게 제 허벅지를 토닥이며 베개로 내주고, 그 짧은 거리를 힘들게 좁힌 사니와의 머리를 곱게 얹어주었다. 사니와는 피 냄새와 흙내가 공존하는 옷자락을 더럽다 하지 않고 신나게 어리광을 부렸다.
"으아아아아! 수리패 마음껏 쓰고 싶다!"
"참으시지요. 그동안 노는 이들을 원정 보낼 꾸준함도 없었잖아요?"
"그거야 다른 남사들도 키워야 하니까 그렇지! 이따 태도들도 출진 보내야 하는데. 아나야..."
"벌써부터 헤이안 말투가 옮겨지면 곤란합니다."
가벼운 대화가 오가는 동안 소우자는 사니와의 머리를 곱게 쓸었다. 거친 손 끝에서도 부드럽게 풀어지는 머리 끝이 저물어가는 노을빛을 받아 이렇게나 아름답다. 하염없이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있자니 대화가 끊기고 사니와가 소우자를 빤히 올려다봤다. 숨소리를 제외하고 모든 소리가 흩어지고 나서야 그는 헛기침을 하며 정신을 차렸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사니와는 입꼬리를 올리며 손을 뻗었다. 말라붙기 일보 직전이었던 핏자국이 엄지의 움직임에 차츰 지워져간다. 그럼에도 남은 자욱이 맘에 안 드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소우자의 무릎에 앉았다.
사니와는 근시의 목에 양 팔을 두르고 전쟁의 열기가 식어가는 품에 제 몸을 맡겼다. 오늘도 제 존재감을 뽐내며 호마레를 휩쓴, 자랑스러운 제 연인이 귀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사니와는 긴장하기 시작한 뺨에 부드러운 입술을 눌렀다. 살짝 문지르자 사람의 온도와 맞닿은 핏자욱이 깨끗하게 지워졌다. 근시의 자리를 동생에게 넘겨주고도 자신의 본분을 다한 애도(愛刀)에게 주는 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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